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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손정도목사의 차남 손원태

북한종교


  지난 호에 북한정권이 언급하기를 꺼려하면서 지금까지 비밀에 부치고 있는 손정도 목사의 장남인 대한민국 초대 해군총참모장이며 전 국방부장관이었던 손원일 장군에 대해 설명드렸다.  북한주민들은 손정도목사의 장남 순원일에 대해서는 모르지만 차남인 손원태 박사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으며 그를 손정도목사의 외아들로 알 정도이다. 


김일성은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에서  “나는 한번도 손정도 목사와 그의 유가족들을 잊은 적이 없다. 그들에 대한 추억은 시간과 공간의 끊임없는 교차 속에서도 풍화되지 않고 내 마음속에서 세월과 함께 련면히 이어져왔다. · · · 1991년 5월 미국 네브라스카주 오마하시에서 병리학의사로 일하던 손정도 목사의 막내아들 손원태가 우리 해외동포영접부의 초청으로 부인(리유신)과 함께 우리 나라를 방문하였다. 송화강 모래터에서 소년회원들과 류길학우회원들이 <땅>편과 <바다>편으로 갈라져서 군사놀이를 할 때 매번 내가 속한 편에 들겠다고 싱갱이질을 하던 십대의 연약한 소학생 손원태는 팔갑을 앞둔 백발로인이 되여 내 앞에 나타났다”라고 회고하였다.


김일성보다 2살 동생뻘인 손원태 박사가 60여년 세월이 지난 79세의 나이에 평양을 방문하여 김일성을 만났던 것이다. 김일성이 중학생 시절 길림에서 손정도 목사의 도움으로 길림육문중학교에 다니면서 가까이 지냈던 손원태 박사에 대한 반가움은 회고록 외에도 북한 노동당출판사에서 출간한 ‘재미동포 손원태와 한 담화’에서도 잘 드러나있다.


손원태 박사와 김일성의 상봉은 손 박사가 먼저 편지를 쓴 것이 그 계기가 되었다. 1987년에 손원태 박사는 외국주재 북한대사관 외교관에게 김일성에게 보내는 편지를 보냈으나 당시까지만 해도 북한에서 손정도 목사나 손원태 박사에 전혀 알지 못한 상태여서 해당 일꾼이 그 편지를 상부에 보고하였으나 김일성에게까지는 전달되지 않았다. 1991년 4월에 김일성의 생일 79돌을 맞이하면서 북한을 방문하였던 재미조선인축하단 단장이 미국으로 돌아가기 전에 손원태 박사가 김일성에게 쓴 편지를 준 것이 보고되어 그 다음 달인 5월에 북한을 처음으로 방문하여 상봉할 수 있었던 것이다.


김일성은 당시 손원태 박사를 만난 자리에서 “손정도 목사는 내가 길림에서 활동할 때 나를 각별히 대해주고 물심양면으로 적극 도와주었다. 그래서 나는 해방 후부터 오늘까지 기회가 있을 때마다 손정도 목사에 대하여 자주 이야기하군 한다”고 말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김일성은 어린시절 외조부와 부모들이 출석하던 교회에 다니다가 산에서 빨치산활동을 하고 해방 전에 소련군 장교로 복무하면서 교회에 더 이상 다니지 않았다. 그리고 해방되어서는 자기의 우상화 선전에 모든 종교가 걸림돌이 된다고 생각하고 목사들을 무자비하게 처형하였다. 결국 북한에 있던 교회들이 파괴되었고 해방전 북한에서 목회하던 많은 목사들이 한국으로 내려오게 되었다. 그런 김일성이기에 80고령의 나이가 되기 전까지만 해도 생명의 은인이었던 손정도 목사도 목사라는 이유로 숨기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의 자녀들에 대해서도 역시 언급할 수 없었던 것이다.


많은 사람은 나이가 들어 죽기 전에는 살아온 과거를 돌이켜보면서 그동안 숨겼던 사실들을 자녀들이나 주변의 지인들에게 고백한다고 한다. 김일성도 80고령이 되면서 책임서기를 비롯한 최측근 간부들 앞에서 자기의 어린 시절에 있었던 일들을 회상하곤 하였다. 그때부터 손정도 목사와 그의 아들 손원태 박사에 대한 이야기가 당역사연구소와 노동당출판사에서 내부자료로 공개하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그전까지만 해도 손정도 목사의 자녀들은 해방 후 교회를 파괴하고 목사들과 기독교를 믿는 성도들을 정치범관리소에 마구 처넣은 김일성에 대한 좋지 않는 감정을 가지고 있었기에 북한 방문을 생각해 본적이 없었으나 김일성이 80고령이 되면서 손정도 목사를 ‘생명의 은인’이라고 칭하자 방북을 결심할 수 있었다.


1991년 5월에 손원태 박사를 평양으로 초청하여 만난자리에서 김일성은 화성의숙을 그만두고 길림시에서 살고 있던 손정도 목사의 집을 찾아가 길림육문중학교에 입학하여 손원태와 함께 다녔던 일들을 회고하였다. 그리고 손원태 박사의 어머니가 해준 쫀드기떡을 맛있게 먹었던 일도 추억하였다.


손원태박사는 길림육문중학교를 졸업하고 중국 상해교통대학을 졸업하고 서울에 있던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를 마치고 미국으로 이민을 가서 미국에서 의학대학 교수로, 의사로 지냈다. 김일성의 초청으로 북한을 방문하고 나서 손원태 박사가 자기의 친구인 김동길에게 당시의 일들을 전해준 것이 기록에 남겨지면서 당시 상봉에 대한 구체적인 사실들이 알려지게 되었다.


손원태 박사는 “내가 미국 여권을 들고 중국을 거쳐 평양에 가서 그의 집무실을 찾아 갔더니, 김일성이 처음에는 나를 잘 알아보지 못하다가 한참 내 얼굴을 들여다보더니, ‘야, 너 원태 아니냐?’라고 하면서 일어나서 손원태를 얼싸안고 “원태야! 우리가 앞으로 살면 얼마나 더 살겠느냐, 좀 자주 찾아와라’고 하였다”고 친구인 김동길에게 말했다는 것이다. 김일성의 회고록에는 손정도 목사의 맏딸인 손진실의 결혼상대자인 윤치창에 대해서도 나온다. 회고록에는 손정도 목사가 김일성에게 자기의 딸인 손진실의 혼사 문제를 논의했다고 하는데 이것은 사실이 아니라는 것이 북한역사 전문가들의 주장이다. 나이가 20살 초반인 김일성에게 30살이나 나이가 많은 손정도 목사가 이런 혼사문제를 이야기 하였다는 것은 상식에 맞지 않는다.


김일성은 1991년 손원태 박사를 평양에 초청하여 자기의 이름이 새겨진 스위스산 롤렉스 금시계를 손원태 박사와 부인에게 선물로 주었다. 손원태 박사는 이 금시계를 미국으로 돌아와서 감정평가를 받았는데 한 개의 금시계 값이 5만달러가 된다고 합니다.


손정도 목사의 막내딸이자 손원태 박사의 여동생인 손인실은 1917년 서울에서 태어나 아버지를 따라 길림에 와서 길림육문중학교를 다녔다. 베이징에서 모정여자고급중학고를 졸업 후 이화여자전문학교을 졸업하고 의사였던 문병기 박사와 결혼하였다. 손인실은 남편이 미국으로 유학한 후 남매를 키우며 틈틈이 여성기독교청년연합회(YWCA) 회장직을 맡아 어려운 사람들을 성심성의로 봉사하였다. 그리고 한국 여성단체협의회 회장, 대한 적십자 부총재, 소비자단체 협의회 회장, 한국여성개발원 이사장 등 중요한 사회적인 업무를 역임하여 탁월한 지도력을 발휘하였다.


김일성은 손원태 박사를 만나고 나서 3년만인 1994년에 사망하였다. 김정일은 김일성의 장례식에 손원태 박사를 초청하였고 평양시 삼석구역의 대동강변에 있는 철봉리초대소를 그가 사는 집으로 제공해 주기도 하였다. 김일성이 죽고 나서 10년이 지난 2004년에 손원태 박사도 향년 90세로 사망하였다.


김일성이 생명의 은인이라고 하였던 손정도 목사의 맏아들은 대한민국 국방부장관 등 주요직책에서 일하다 사망하여 북한의 애국열사릉이라고 할 수 있는 서울시 동작동에 있는 국립현충원에 안치되어 있지만 둘째아들인 손원태의 시신은 평양시 애국열사릉에 안치되어 있다.


한 형제로 태어나 서로 남과 북으로 헤어져 안치된 손정도 목사의 자녀들에 대해 생각해 보면 우리민족의 가슴 아픈 현대사를 다시 한 번 절감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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