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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마약공화국 북한-그 실체를 조명하다. (1)

의화리 백도라지 농장

마약공화국 북한-그 실체를 조명하다: (1)의화리 백도라지 농장


북한당국이 경제난 극복을 위해 아편과 필로폰 등 마약들을 대량으로 생산한 사실은 이미 비밀이 아니다. 북한에서 마약이 해방 이후에 고위간부들의 기호품으로 생산되었다는 사실도 비밀이 아니다. 결국 경제난 이전에 소위 ‘항일투사’들이 총상의 통증을 치유한다는 구실로 아편을 심어 사용하였던 것이다. 아편재배에 유리한 자연환경을 가진 고산지대의 양강도 보천군에는 해방 이후에도 인근에 항일투사들의 피서지가 여러 곳에 있었다. 이곳 김일성과 김정일의 별장 주변에 있던 호위사령부 위수구역 내에는 외부인원들이 접근할 수 없었고 그런 이유로 항일투사들을 위한 아편재배 농경지들이 여러 곳에 있었다. 그리고 양강도 도당과 도인민위원회, 보천군 당위원회와 인민위원회에서는 인적이 드문 산골짜기들에 항일투사들을 위한 아편재배 농경지를 마련하고 해마다 진을 채취하여 제공하였다. 이렇게 소극적으로 재배하던 아편이 1990년대 이후로는 대대적으로 재배되었고 아편 외에도 필로폰을 비롯한 다양한 마약들이 생산되기 시작하였다. 점점 북한은 마약에 찌들어 갔으며 마약중독자들은 북한당국의 시범케이스에 걸려 처형당하곤 하였다.

 

이 기사를 시작으로 북한이 마약공화국으로 된 과정과 실태에 대해 여러 회에 걸쳐 그 진실을 파헤쳐보려고 한다.

 

북한에서 아편을 대대적으로 재배한 것은 1990년 1월 8일 방침이 나와서 부터이다. 당시에 김일성의 교시라고 했지만 사실은 김정일이 기획하고 방침하달도 김정일의 책임서기를 통해 전달되었다는 것을 미루어 보았을 때 ‘김정일 방침’이라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하다고 할 수 있다.

 

북한은 1980년대 말, 구소련을 중심으로 한 동유럽사회주의가 붕괴되고 사회주의 시장체계가 무너지면서 심각한 경제적 위기에 내몰렸다. 70년간 이어진 사회주의 이상사회 건설에 대한 미련은 수많은 인민의 가슴에 상처만 남긴 채 사라져버렸다.

 

중국은 일찍이 개혁개방의 길을 걸었던 결과 다른 사회주의 국가들처럼 혼란을 겪지 않고 공산당의 체제를 유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김정일은 동유럽국가들의 사회주의 붕괴에서 교훈을 찾을 대신 선군정치를 내세운 독재강화로 그 해결책을 강구했다.

 

동유럽 사회주의가 붕괴되자 러시아와 체코슬로바키아를 비롯해 옛 동구권 국가들은 여태껏 북한이 진 빚을 청산하라고 불같이 독촉했다. 중국당국도 진 빚을 더 이상 미루지 못하겠다며 북한을 강하게 압박하고 나섰다.

 

그동안 김일성이 외치던 자력갱생 구호가 얼마나 공허한 타령이었는지는 당시 북한이 처한 어려운 환경이 잘 대변해 주었다. 자력갱생 구호에 파묻혀 세계와 담을 쌓고 살던 북한은 발전소 설비 하나 제 손으로 만들지 못하는 후진국으로 전락되어 있었던 것이다. 외국에 진 빚을 갚기는커녕 당장 인민들을 먹여 살릴 길도 막막하던 때였다. 김정일은 체제 유지를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급해 맞은 김정일은 외화를 벌어들이기 위해 아편을 재배하는 국제적인 범죄도 서슴지 않았다.

 

김정일이 아편에 호기심을 가지게 된 데에는 1989년에 평양에서 개최된 ‘제13차 세계청년학생축전’의 영향이 컸다. 한국의 ‘88 올림픽’에 대응하기 위해 분별없이 행사를 요란하게 치루면서 가뜩이나 위태로웠던 재정은 바닥이 나고 말았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한국에서 개최되는 ‘88 올림픽’을 파탄내기 위해 대한항공 여객기 ‘KAL - 858기’를 폭파시켜 수많은 인명을 살상하여 국제사회의 비난의 대상으로 주목받았다. 여기에 북한이 의지해 오던 국제사회주의 시장마저 해체되면서 김정일은 사지로 내몰릴 처지에 이르렀다. 더 이상 수수방관 할 수 없었던 김정일에게 대안으로 떠오른 외화벌이 수단은 국제사회가 엄중한 범죄로 규정지은 마약제조와 거래였다. 북한은 해방 후부터 모르핀과 아트로핀과 같은 마약 제조를 목적으로 함경남도 단천시에서 소규모로 아편을 재배해 왔다. 1980년대 북한 인민군 정찰총국은 이곳에서 재배된 아편을 국제범죄조직과 거래해 폭리를 취한 경험도 있었다.

 

외화원천이 부족했던 김정일에게 있어서 아편은 손쉽게 억만금을 긁어모을 수 있는 최상의 수단이었다. 외화를 벌어들일 다른 방법을 찾지 못했던 김정일은 1990년 1월 8일 국가적으로 아편을 재배할 데 대한 방침을 제시했다.

 

현재 북한전문가들 중 일부는 1990년 1월 8일 방침이 김정일이 기획하고 김일성이 직접 지시했다는 주장을 내놓기도 한다. 그들이 김일성이 주도적으로 아편재배를 결정하고 지시했다고 하는 이유는 그해 7월 김일성이 양강도 삼지연군 포태노동자구에 있는 별장으로 피서를 가던 중 양강도 보천군 의화리 제9작업반에 들렸던 사실때문이다. 보천군 의화리 제9작업반은 삼지연군 포태노동자구로 이어지는 김일성 전용의 1호 도로와 인접해 있었다.

 

의화리 9작업반은 해방을 몇 달 앞둔 1943년 3월에 일제에 의해 서대문 형무소에서 처형당한 갑산공작위원회 간부 리제순의 고향이다. 1960년대 종파로 몰려 김일성에 의해 숙청된 갑산파 사건의 주요 인물 리효순은 리제순의 친형이었다. 북한은 갑산공작위원회 장백현지구 부위원장으로 김일성의 빨치산을 물심양면으로 도운 공을 인정해 1964년 고향인 양강도 보천군 의화리 제9작업반에 생가를 다시 짓고 마당 앞에는 구리로 제작된 리제순의 반신상도 실물 크기로 세웠다.

 

보천군 운남리는 리제순과 함께 서대문 형무소에서 옥살이를 하던 중 해방을 맞아 풀려난 박달의 고향이다. 이곳에도 박달의 생가와 반신상이 세워져 있다. 김일성은 해마다 피서 철이면 이곳을 지나 삼지연군에 있는 별장으로 갔다. 그러나 갑산파가 떠올라서 그런지 김일성은 리제순과 박달의 생가엔 한 번도 들른 적이 없었다. 그러던 1990년 3월 김일성은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의 집필을 위해 몰래 삼지연군을 방문하고 돌아가던 중 갑자기 리제순의 생가에 들렸다. 리제순의 반신상을 바라보던 김일성은 구리로 된 겉면에 녹이 쓸지 않도록 금박을 입힐 것을 지시했다.

 

눈이 녹는 농장 포전(鋪田)을 한참 바라보며 무언가 깊은 상념에 골몰하던 김일성은 문득 동행하던 ‘당역사연구소’ 소장 강석승에게 여기에 한번 아편을 심어보면 어떨 것 같냐고 물었다. 아편이라는 소리에 주변 간부들은 귀를 의심했다고 한다. 리제순의 동상에 녹이 쓴 문제로 짜증을 내던 김일성을 달랠 길이 없었던 ‘당역사연구소’ 소장 강석승은 아편이라는 말이 나오자 양강도 당위원회의 간부들에게 좋다는 의사를 표시하라고 눈빛으로 암시를 했다. 그 자리에서 김일성은 아편은 많은 외화를 벌 수 있으면서 타락한 자본주의를 더 빨리 멸망시킬 수 있는 소리 없는 무기라고 하면서 아편재배의 정당성을 역설했고 아편을 심을 데 대한 김일성의 지시가 즉각 아미산총국에 하달됐다.

 

1990년 4월 아미산 총국은 김일성이 지정해 준 보천군 의화리 제9작업반에 시범적으로 아편을 심었다. 그해 7월 김일성은 피서 철을 보내기 위해 삼지연으로 향하던 중 다시 의화리 9작업반에 들려 하얀 꽃이 핀 아편 밭을 둘러보았다. 아편 진을 채취할 수 있는 주먹 같은 씨앗 통을 직접 만져보며 김일성은 양강도 보천군을 대담하게 아편농장으로 전환하라고 부추겼다. 또 아편이라는 이름이 듣기에 거북하다며 대신 아편을 백도라지로 부르라고 이름까지 붙여주었다. 그때부터 북한은 아편을 백도라지로, 아편농장을 백도라지농장으로 부르게 되었다. 1990년 7월 중순부터 8월 중순까지 보천군 의화리 제9작업반에서 시범적으로 재배한 아편 밭에서 북한은 순도 높은 아편 13kg을 채집할 수 있었다.

 

김일성은 여름철이면 무더위를 피해 삼지연 별장에 가서 휴식을 취하곤 하였는데 별장으로 가는 노정에 거치게 되는 의화리에 수행간부들이 김정일의 지시로 김일성을 인도하여 이런 현지시찰들이 이루어졌을 것이라고 본다. 당시는 김정일이 김일성보다 북한의 모든 권력을 더 행사하던 시기여서 수행간부들도 김정일의 지시에 더 충실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다음해 김정일 경호부대인 호위사령부 소속의 아미산 총국은 보천군 의화리와 청림리를 산하 아편농장으로 전환했다. 아편농장은 국영종합농장에 속하기 때문에 농민들은 농업근로자로 되어 매달 당국으로부터 월급과 배급을 받으며 생활했다. 그렇게 재배한 아편이 ‘고난의 행군’시기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앗아가고 가난한 나라를 마약에 찌든 왕국으로 만들어 버릴 줄 당시까진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다. 오히려 아편을 팔아 생활이 훨씬 더 좋아질 것이라는 황당한 소문들이 아편농장 농민들을 흥분시켰다.

 

다음 편에서는 청림리 아편농장에 대해 소개해드리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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