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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대한민국 건국의 숨은 주역-서북청년회(11)

- 다시 읽는 《서북청년회가 겪은 건국과 6.25》/손진 지음, 건국이념보급회 출판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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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력 동원에 끌려가다

 

손진이 남대문 지하도 앞을 지나는데, “손 선생님!” 하고 누군가 부른다. 뒤를 돌아보니, 목에 흰 붕대를 감고 등산모를 쓴 윤택구가 서 있었다. 윤택구는 윤일선(제6대 서울대 총장) 박사의 아들이다.

 

윤택구는 헌 만년필을 널빤지 위에 놓고 팔고 있었다. 손진은 그와 허름한 식당에 들어갔다. 비록 판잣집 식당이었지만, 흰 쌀밥을 수북이 담아 주었다.

 

윤택구는 순식간에 밥그릇을 비웠다. 손진은 그 모습이 가슴 아팠다. 그의 아버지 윤일선 박사는 일제 강점기에 일본, 중국, 만주에 걸쳐 병리학자로 명성을 떨치던 대학자였다.

 

“아버지에게 꼭 전하게. 머지않아 유엔군이 서울에 올 거야. 그때까지 피신하시라고. 그대로 있다간 북한으로 끌려가게 돼. 아버지는 북한에서도 매우 필요한 분이기 때문이야.”

 

손진은 동화백화점(소공동 신세계백화점) 옥상에 올라가서 난간을 끼고 한 바퀴 돌았다. 옥상에는 다행히 사람이 적었고, 어린아이들만 뛰놀고 있었다. 멀리 한국은행이 보였다. 명동 입구와 반대편 남대문시장 앞에서는 통행인이 총총걸음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바람은 잔잔했다.

 

그는 전단을 난간에 얹고 그 위에 모래를 한 줌 놓았다. 그러고는 백화점을 빠져나와 후암동 아지트로 향했다. 전단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유엔군이 드디어 낙동강 전선을 무너뜨리고, 도망가는 북한군을 추격하여 북상 중이다. 서울 시민은 용감하게 싸워라. 대한유격대장 P1.’

 

연락을 받았다는 것은 물론 거짓이었다. 그러나 서울 시민은 사실로 받아들일 것이다. 그는 동화백화점에서 나와 남산 힐튼호텔 앞을 지나가고 있었다. 그때 누군가 “동무!” 하고 불렀다.

 

그가 끌려간 곳은 민청사무실이었다. 마당에 청장년 100여 명이 끌려와 있었다. 누군가 “미제 비행기가 폭격으로 파괴한 것을 오늘 하룻밤에 복구해 주기를 바란다”는 말을 했다. 이게 바로 ‘노력 동원’이구나 생각했다. 하룻밤 경험해 보아도 좋겠다고 여겨졌다.

 

끌려온 이들은 시키는 대로 두 줄로 서서 남대문 쪽으로 내려갔다. 저녁을 먹지 못해서 배가 고팠다. 마침 장사꾼이 일행을 따라오며 ‘꽈배기’를 사라고 한다. 꽈배기는 6.25 때 생겨난 과자로 밀가루를 반죽해 새끼 꼬는 방식과 반대로 꼬아 튀긴 것이다. 꽈배기 두 개를 사서 먹으며 행렬에 끼어들었다.

 

남대문 가까이 왔을 때였다. 일행의 인솔자였던 한 청년이 옆으로 다가와 자연스럽게 말을 걸었다.

“선생님, 이런 일 처음이지요?”

그렇다고 대답했다. 청년이 아무 말 없이 앞으로 갔다.

 

‘선생님’이란 호칭은 아무래도 어색했다. 당시는 대개 ‘동무’라는 호칭을 썼기 때문이었다. 적진에서 자기 과거를 아는 이를 만나는 것은 생사와 관계된 중요한 일이었다. 그는 아무리 생각해도 그 청년이 누군지 기억에 없었다. 그러나 그의 언행으로 보아 악의가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통금 시간이 되었다. 날이 어두워졌다. 도망칠 수 있을 것 같았지만, 잘못하면 큰 화를 자초할 수도 있다. 더 참아보자고 마음먹었다.

 

‘노력 동원’ 대열이 도착한 곳은 붉은 벽돌로 지어진 중구 세무서 뜰 안이었다. 정문에는 내무서원 두 명이 총을 들고 서 있었다. 이미 많은 청장년이 2열 종대로 줄을 지어 앉아 있었다. 손진 일행도 틈바구니에 끼어 앉았다.

 

노력 동원에서 탈출

 

잡혀 온 인원은 어림잡아 천 명에 가까웠다.  손진은 평온한 심정으로 다음 지시를 기다렸다. 그때 아까 “선생님, 이런 일은 처음이시지요?”라고 묻던 청년이 옆으로 와서 나직한 목소리로 맨 뒤에 가서 앉으라고 한다. 그는 시키는 대로 했다.

 

주위는 캄캄했다. 전기는 물론 촛불조차 없었다. 총책임자인 듯한 사람이 연단에 올라 장황하게 연설했다. 연설이 끝나자 박수가 터져 나왔다.

 

일행을 인솔하던 그 청년이 맨 뒤쪽으로 다가와서는 손진에게 자기를 따라오라고 했다. 그는 무조건 청년을 따라갔다. 정문에 이르자 청년은 총을 든 보초에게 “노력 동원을 인솔해 주고 갑니다”라고 말했다.

 

정문을 무사히 나온 두 사람은 명동성당 앞을 나란히 걸었다.

“선생님 댁이 어딥니까?”

청년이 물었다. 손진은 회현동이라고 대답했다. 그는 청년의 정체가 궁금했다.

 

“여러 번 뵌 분 같은데, 기억이 나질 않습니다.”

청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명동거리를 지나 회현동 입구에 이르렀을 때, 청년이 말했다.

“여기서 댁으로 가십시오. 저는 이 길로 민청사무실로 가렵니다.”

 

둘은 악수를 하고 헤어졌다. 회현동으로 올라가는 길은 캄캄했다. 통행금지 시간이라 인기척이 전혀 없었다.

 

후암동 아지트까지 가려면 한참 가야 했다. ‘그렇다면 어디서 하룻밤을 새우나?’ 그는 남산에서 보낼 생각도 했지만, 위험할 듯했다.

 

서북청년회 감찰부장을 역임한 철원 출신 후배인 박상준이 떠올랐다. 물론 박상준은 피란 가고 없겠지만, 그의 집에 가서 하룻밤을 신세 질 생각을 했다.

 

일본식 집 대문을 두드렸다. 한 노파가 나왔다. 함경도 사투리를 쓰고 있었다.

그는  “자신은 박상준의 친구로 후암동에 사는 통장인데, 노력 동원을 인솔해 주고 돌아가는 길이다. 통행금지 시간에 걸려 하룻밤 신세를 질까 하고 들렀다”라고 말했다.

 

노파는 박상준이 피란을 가면서 집을 보아 달라고 해서 와 있다고 했다. 그는 박상준이 쓰던 6조 다다미방에 들어갔다.

 

옆방에서 노파와 여학생이 주고받는 소리가 들렸다. 여학생은 낯선 사람이 오면 민청 사무실에 신고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자 손진은 큰 소리로 “노력동원 인솔해 주고 가는 길이니 염려할 것 없다. 누가 오면 내가 책임지겠다”라고 타일렀다.

 

빈대가 많아 잠을 잘 수 없었다. 뜬눈으로 밤을 새우는데, 멀리서 포성이 들려왔다. 새벽 4시쯤 두어 집 건너 포탄이 떨어졌다. 마치 그가 누워 있는 집이 폭격당한 듯 집이 흔들렸다.

 

그는 재빨리 그 집을 빠져나왔다. 남대문시장 쪽으로 내려갔다. 그날은 인천상륙작전이 시작된 9월 15일이었다. 멀리서 은은하게 들려오는 포성은 인천상륙작전을 시작하기 위한 함포사격이었다. 그러나 서울 인민위원회는 그 포성이 미군기가 폭파한 교량 복구를 위한 발파 작업 소리라고 거짓말을 했다.

 

그날 오후 ‘유엔군이 인천에 상륙했다’는 소문이 서울 장안에 파다하게 퍼졌다. 손진은 밤에 남산 마루턱에서 서쪽 하늘을 바라보았다. 사과 색깔 붉은빛이 줄을 그으며 나타났다가는 이내 사그라지기를 수없이 반복했다. 그 섬광은 마치 그의 심장에서 선혈을 내뿜는 것 같았다. 그는 눈물을 흘렸다.

 

인천상륙작전이라는 반가운 소식

 

인천상륙작전은 인천 앞바다에 있는 팔미도 등대 불이 9월 15일 0시에 점화되면서 시작되었다. 그것을 신호로 대기 중이었던 261척 대선단이 인천에 진입, 일제히 함포 사격으로 불을 뿜기 시작했다. 공주에서도 폭탄이 비 오듯 내렸다.

 

인천상륙작전 준비는 극비리에 진행되었다. 작전 개시 전 8240부대 KLO의 서북청년회 출신 특수임무 대원들이 인천 앞 영흥도를 전진기지로 삼아 덕적도, 팔미도 등지를 샅샅이 탐색했다. 적정은 물론 간만의 차, 수심까지 정확하게 보고했다. 인천상륙작전은 인천 앞바다의 모든 것이 손바닥 들여다보듯 상세히 파악한 후에 감행되었다.

 

KLO 대원 서북청년회 출신 20여 명이 영흥도에 주둔했다가 희생됐다. 그들은 인천상륙작전 성공 소식을 하늘에서 듣고 기뻐했을 것이다. 지금도 매년 9월 15일이면 KLO 전우회가 인천방위사령부의 도움으로 팔미도에 등대 탈환 기념식을 하고 있다.

 

 9월 16일. 서울에 인천상륙작전 소식이 전해졌다. 인민위원회 등 공산당 기관원들이 권총을 차고 분주히 오갔다. 시민들의 나들이가 줄었다. 거리는 한산했다.

 

손진은 휘가로다방에서 강성구를 만나야 했고, 남대문에서 이대영을 만나야 했다. 윤영선을 만나 박순천 의원의 안위를 알아야 했다. 그가 분주히 사람들을 만나고 아지트로 돌아가는데, 거리에서 우연히 자전거 점포를 하는 A를 만났다.

 

“어떻게 되는 거야?”

A가 물었다.

“어떻게 되기는 무엇이 어떻게 돼? 도망가야지. 빨리 서울시 인민위원장 이승협을 만나 자전거 외상값이나 받아. 빨리 받지 않으면 못 받게 돼.”

 

손진이 퉁명스레 말했다.

그러자 A가 “그놈들 외상값 줄 생각은 안 하고, 화만 낸단 말야” 하고 사라졌다.

 

9월 17일. 미군이 인천에 상륙한 지 3일째였다. 그러나 서울 시민이 애타게 기다리는 미군의 모습은 나타나지 않았다. 북한군의 저항이 결사적이었던 모양이었다.

 

대한유격대가 낙동강 전선을 돌파해 걸어서 서울까지 오는 데 15일이 걸렸다. 그것을 생각하면, 서울 주변 북한군은 인천에 상륙한 미군과 국군을 2주간은 막아 주어야 했다. 그래야 낙동강 전선 북한군이 서울을 지나 북한으로 도망갈 수 있을 것이다.

 

9월 17일 아침부터 서울 북한군의 움직임이 달라졌다. 그들은 서울 시내 간선도로인 중앙로, 종로, 을지로, 안국동 거리를 지나 미아리로 빠지는 도로에 바리케이드를 구축하기 시작했다.

 

바리케이드는 가마니에 흙을 담아 세 겹으로 쌓은 것으로 중앙에 전차가 통행할 수 있도록 열어놓았다. 바리케이드와 바리케이드 간격은 100미터 내지 150미터 정도였다.

 

북한군이 시가전을 준비하는 것으로 보였다. 손진은 많은 사람이 죽겠구나, 생각했다. 서울 상공을 나는 유엔군 비행기 숫자도 많아졌지만, 포격도 심해졌다.

 

강성구가 유격대원으로 포섭했다는 홍덕영, 이현구를 만나기 위해 휘가로다방으로 갔다. 강성구가 손을 들었다. 손진은 처음 보는 두 사람과 무언의 악수를 했다. 비록 초라한 의복에 밀짚모자를 쓴 볼품없는 차림이었지만, 나지막하게 말했다.

“두 분 동지에게 유격대원의 임무를 주겠소. 오늘 중으로 개성에 다녀오시오.”

 

개성에 파견된 두 동지

 

두 사람을 개성에 파견한 목적은 첫째, 인민군의 후퇴 상황을 알아보고, 둘째, 인민군이 아닌 일반 민간인의 북행 상황을 파악하고, 셋째, 개성의 민심 동향을 파악하기 위해서였다.

 

홍덕영은 축구 국가대표 골키퍼로 유명했고, 이현구도 화가로 장래가 촉망되는 청년이었다. 개성까지 북상하는 데는 큰 어려움이 없겠지만, 서울로 돌아오는 게 문제였다. 북쪽으로 도망치는 무리를 피해야 했다.

 

9월 18일. 미군이 인천에 상륙한 지 4일째 접어들었다. 도대체 어디까지 진격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소문에 따르면, 미군이 이 마을 저 마을을 모조리 소탕하다 보니, 진격이 지연된다는 것이었다.

 

미군이 철수한 날 밤이면 숨어 있던 북한군과 좌익이 나타나 낮에 미군을 환영했던 사람들을 무조건 살해한다고 했다.

 

미군은 어떤 지점을 점령하면 그대로 머물지 않고, 일단 본대로 철수했다가 다음 날 다시 진격한다고 했다. 그 공백기에 인명 피해가 났다.

 

9월 20일. 미군이 부천 일대에서 소탕전을 끝내고 서울을 향해 진격 중이라는 소문이 자자했다. 이제 서울 시내에는 북한군이 보이지 않았다. 통행인도 많지 않았다. 보이는 것은 평복에 권총을 차고 레닌모를 쓴 기관원뿐이었다.

 

기관원의 핵심은 북한에서 내려왔지만, 하수인 대부분은 서울 토박이 좌익이었다. 이들은 우익 민족진영 인사를 찾아내 끌고 가서 모조리 살해했다. 그러고는 북한으로 도망갔다.

 

후암동 아지트를 출발한 손진은 시내 명동 일대, 을지로 종로 일대를 살피며 돌아다녔다. 중부경찰서와 지금의 스카라극장 사이는 폭격으로 폐허가 되어 있었다. 종로 동대문시장 일대와 청계천 건너 평화시장 일대는 허허벌판으로 변했다. 파고다공원, 운현궁, 천도교회관에 둘러싸인 지금의 낙원시장 일대도 벌판이 되었다. 그 사이로 시민들이 다니는 소로가 나 있었다.

 

그런데 역사 유적인 탑골공원, 천도교회관, 운현궁 등은 아무 피해를 받지 않았다. 서울역 역사 서쪽 봉래동 일대는 무사한 데 반해 서울역 앞쪽은 피해가 컸다. 남대문 경찰서도 폭격을 당했다. 그러나 세브란스병원만은 무사했다.

 

서울시청을 중심으로 중앙청까지 좌우 양쪽이 모두 폭격을 당했다. 그러나 조선호텔, 덕수궁, 반도호텔(롯데호텔), 조선일보사, 동아일보사만은 멀쩡했다. 이것으로 유엔군 비행기가 유적지를 비롯해 주요 시설을 피해 폭격한 것은 아닐까 유추해 볼 수 있다.

 

9월 21일. 박순천 의원이 숨어 있던 광화문 네거리 파출소 뒤 김 여사의 집이 폭격을 당했다. 김 여사는 이마를 다쳤고, 식모 아이도 파편을 맞았다.

 

다행히 박순천 의원만은 무사했다. 박 의원은 피투성이가 된 김 여사를 업고 서소문에 사는 딸네 집에 옮겼다. 그러고서 박 의원은 안국동 네거리에서 조계종 뒷문으로 빠지는 골목 입구 또 다른 딸네 집으로 갔다고 했다.

 

그 후 박 의원은 또다시 계동 창덕고녀(현재 헌법재판소) 옆 딸네 집으로 옮겼다. 윤영선은 형수 김 여사를 손수레에 태워 집으로 데리고 와 봉합 수술을 했다.

 

포성이 점차 가까워졌다. 국군과 유엔군이 서울 진격이 임박했음을 뜻했다. 개성에 파견한 홍덕영, 이현구는 이틀이나 빨리 돌아왔다. 임진강을 넘었지만, 장단에서 막혀 되돌아왔다.

손진은 고생했다는 위로의 말과 함께 단호한 어조로 훈시했다.

 

“적진에서 유격대원은 실수나 사과는 통하지 않습니다. 목적 달성을 하느냐, 못하느냐 둘 중 하나입니다. 두 분은 처벌받아야지만, 훈련 없이 초행이었던 만큼, 관대하게 처리하겠으나, 두 번 다시 용서는 없다는 것을 명심하기 바랍니다.”

 

인천에 상륙한 아군은 그 속도는 느렸지만, 서울을 향해 진격을 계속했다. 한강 남단인 영등포에 도달했다. 그러나 주력부대는 한강교나 마포 방향으로 강을 건너는 대신 엉뚱하게도 수색 방향으로 공격했다.

 

그쪽이 방어진지가 허술할 뿐만 아니라, 적의 퇴로를 먼저 끊어 놓을 필요가 있다고 판단한 것 같았다.

 

드디어 인천상륙 부대가 한강을 건넜다. 그러나 북한군이 연희고지 등 지리적으로 유리한 곳을 선점해 완강한 저항을 벌여 아군의 발이 묶였다. 포탄 소리가 가까워졌다. 서울 시내에 대낮에도 포탄과 박격포가 수없이 떨어졌다.

 

이때 대한유격대 제2진 3인(황해도 출신)이 저녁 무렵 북한군 후방 연희고지의 큰 소나무에 태극기를 게양했다. 그 때문에 북한군은 후방이 포위당한 것으로 착각하고 일단 후퇴했고, 이 기회를 틈타 미군이 공격을 개시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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