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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대한민국 건국의 숨은 주역-서북청년회(8)

다시 읽는 《서북청년회가 겪은 건국과 6.25》/손진 지음, 건국이념보급회 출판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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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북청년회와 6.25 사변

 

 

6.25 남침이 시작된 지 3일 만에 수도 서울이 함락되었다. 3개월이 지난 9월 28일 국군과 유엔군의 반격으로 서울이 수복되었다. 그 3개월 동안 대한민국이 겪은 고통은 한 마디로 생지옥이었다.

 

손진은 그때 부산 피란지에서 한 달 반을 보냈다. 이후 대한유격대 대장으로 대원 11명과 북쪽으로 팔공산 전선을 돌파해 비밀리에 서울로 왔다. 한 달 동안 서울에 숨어서 활동했다.

 

손진과 대한유격대 대원들은 서울로 올라오기 전 경북 영천 신영면 골짜기를 거쳐 팔공산 서북방에 주둔하고 있는 공작과 소속 유제극 부대에서 기초 훈련을 받았다. 8월 14일 유제극 부대장은 손진이 이끄는 부대를 ‘대한유격대 제11지대’로 명명하고, 인식표를 수여했다.

 

흰색 나일론 천으로 된 인식표에는 태극마크가 선명하게 인쇄되어 있었다. ‘대한유격대’라는 청색 글씨가 태극마크를 둘러싸고 있었다. 손진의 인식표에는 그의 암호 P1이 인쇄돼 있었다. 손진은 생각했다. ‘이 시각부터 나는 없고 P1만 있는 것이다.’ 그는 문희모를 조직부장, 정명도를 선전부장으로 임명했다.

 

유제극 부대장은 엄숙하게 유격대의 임무를 하달했다.

첫째, 서울에 도착하면 ‘유엔군 서울 입성 환영준비위원회’를 만들 것.

둘째, 후방 교란 작전을 전개할 것.

셋째, 요인을 구출할 것.

유격대에 지급된 무기는 카빈총 2정과 수류탄 2개씩이었다.  식량은 미숫가루 2봉지(대구 애국부인회 기증품)와 건빵 2봉지가 내어졌다. 현찰은 2만 원씩 주어졌다.

 

낙동강 전선을 북쪽으로 돌파

 

대한유격대는 팔공산 전선을 돌파해 밤새도록 북쪽을 향해 걸었다. 계곡을 건너고 길 없는 산을 헤맸다. 팔공산을 완전히 벗어나 야산에 접어들자 먼동이 텄다. 낮에는 팔공산 서쪽에서 총성이 요란하게 들려왔고, 밤에는 조용했다. 유격대는 낮에는 쉬고 밤에만 행군했다.

 

적진에서 아침을 맞았다. 야산 남향 중턱에서 쉬기로 했다. 문제가 생겼다. 정명도 대원이 불응하고 산 정상으로 갔다. 문희모 대원이 단도를 꺼내 보이며 손진에게 단호하게 말했다. “형님, 정명도를 처단하겠소. 적진에서 행동이 통일되지 않으면 전멸을 당하오. 명령에 절대복종해야 하오!”

 

문희모는 해방 직후 견지동 시천교회당에서 열리고 있던 공산당 집회에 폭탄을 던진 당찬 성격의 인물이었다. 38선을 넘나들며 신탁통치 반대 투쟁 선전 문건을 철원에 살포하기도 했다. 정명도와는 같은 철원 출신으로 둘은 죽마고우 사이였다.

그러나 손진은 정명도를 처단하라고 할 수는 없었다. 산으로 올라가 그를 설득해 데리고 내려왔다.

 

8월 17일이 되었다. 밤새도록 걸었지만, 이 산에서 저 산으로 온 게 전부였다. 이렇게 산을 타고 가다가는 한 달이 걸려도 서울에 도착하지 못할 것 같았다. 식량도 반 정도만 남아 있었다. 손진은 하산을 결심했다.

 

그는 “강요는 안 한다. 하산을 희망하는 사람은 나오라”라고 했다. 공교롭게도 6명씩 나뉘었다. 등산 조의 책임자로 문희모를 임명했다. 손진은 하산 조를 인솔했다. 3명씩 나누어 하산하기로 했다.

 

손진은 강창일(함북 청진), 이규범(함북 회령)과 함께 평복으로 갈아입고 간단한 보따리를 들고 피란민으로 가장했다. 하산하며 말을 맞추는 연습을 했다.

 

강창일은 남로당 당원으로 서울약대 재학 시 공청 위원장을 지냈던 이력이 있었다. 그 때문에 6.25 사변 전 부산에 피신했던 좌익으로 위장했다. 이규범은 강창일과 같은 조직에서 활동한 것으로 위장했다.

 

손진은 해방 직후 학병동맹을 하면서 강창일을 알게 되었으나, 몸이 약해 고향인 영천에서 여학교 교사 생활을 했다는 식으로 위장했다. 수없이 되뇌다 보니 사실같이 느껴졌다.

 

유격대원들이 국도에 접어들었다. 국도는 물론 들판에도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역겨운 냄새가 풍겼다. 도로 한가운데 황소가 죽어 있었다. 소의 내장이 도로에 널려 있었다. 그 옆에는 우마차가 산산조각이 나 있었다. 비행기 공격을 당한 듯했다. 갑자기 파리 떼가 공격했다. ‘송장 먹는 파리’라는 말이 있는데, 파리 크기가 손가락만큼이나 컸다.

 

일행은 경북 의성을 지나고 있었다. 그곳은 미군의 폭격으로 완전히 폐허가 돼 있었다. 여기저기 탄약 상자가 불탄 함석이 덮인 채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북한군은 폭격으로 폐허가 된 지역은 유엔 공군이 또다시 폭격하지 않을 거라 판단한 것 같았다.

 

국도를 따라 서울을 향해 북상하면서 일행은 피란지 부산에서 발표하는 국군과 유엔군의 전과가 거짓이 아님을 확인했다. 교량이란 교량은 모조리 파괴되었고, 움직이는 것은 차량이며 마차, 자전거까지 쓸어버렸다.

 

평양에서 서울을 거쳐 낙동강 전선에 이르는 적의 보급로는 길었다. 그런데 제공권을 완전히 상실한 상태였으니, 보급이 제대로 될 리 없었다. 대한유격대 대원들은 후방 깊숙이 들어갈수록 적이 더는 지탱하지 못하리라는 것을 실감했다.

 

무엇보다 적이 탄약 수송에 어려움을 겪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국도 양쪽 풀숲에 크고 작은 철제 탄약 상자가 즐비하게 은폐돼 있었다. 낮에는 비행기 때문에 꼼짝 못 하고 있다가 밤에만 마을 사람들을 동원하여 지게로 날랐다. 전쟁의 결과는 뻔해 보였다.

 

적 후방에서 북한군을 만나다

 

손진 일행은 어느 지점인지는 모르나, 큰길가 한 마을에 다다랐다. ‘위대한 김일성 만세! 토지개혁 만세!’라는 벽보가 여기저기 붙어 있었다.

그때 “동무들!” 하면서 북한군 두 명이 그들을 불렀다. 얼핏 보아 전투병은 아니었고, 정치군인인 듯했다. 북한군과 한 첫 대면이라 긴장이 됐다.

“동무들, 어디서 오는 길이요?”

강창일이 대답했다.

“전쟁 전에 좌익 활동을 하다가 저 사람(이규범)과 부산에 숨어 있다가 서울이 인민군에게 해방되었다기에 영천에서 이 사람(손진)을 데리고 서울로 가는 길이오.”

북한군은 그들이 부산에서 온다는 점에 관심을 가졌다. 부산의 현황에 대해 여러 가지를 물었다. 전선을 어떻게 넘었냐고 묻기도 했다.

 

질문이 끝나자 소지품을 검사했다. 의심받을 만한 것이 있을 리 없었다. 손진의 보따리에는 양담배 ‘아까다마(럭키 스트라이크)’ 8갑, 미제 껌 3통, 미제 치약과 칫솔, 양말, 손수건, 내의 등이 전부였다. 손진은 미제 껌 한 개를 주면서 먹으라고 권했다. 북한군은 호기심을 보였지만, 먹지는 않았다. 담배를 받아 피웠다. 이렇게 해서 그들은 북한군과 한 첫 대면을 무사히 넘길 수 있었다.

 

8월 20일 경북 최북단 새재(조령)에 도착했다. 오는 동안 마을 앞을 지날 때마다 자위대다 민애청(민주애국청년동맹)이다 하는 좌익단체에 걸려 여러 번 조사를 받았다. 하지만 짜 놓은 시나리오대로 부산에서 해방된 서울로 가는 좌익이라는 말로 탈 없이 통과했다.

 

문경에 도착하기 전, 꺾어지는 듯한 계곡을 가고 있는데, 풀잎으로 위장한 삼륜 오토바이 한 대가 달려와 일행 옆에 멈춰섰다. 운전병과 북한군 장교 두 명이 타고 있었다. 몸을 풀로 위장하고 있어 계급을 알아볼 수는 없었다. 하지만 착용한 군복으로 보아 고급 장교가 분명했다. 그들 중 하나가 다급하게 물었다.

“동무들! 미국 비행기를 못 봤소?”

“못 봤습니다.”

이규범이 대답하자, 다른 말 없이 떠나버렸다. 일행은 적군 지역에서 자동으로 움직이는 물체를 본 것이 처음이었다. 그들의 태도로 적이 미군 비행기를 두려워하고 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내무서 유치장에 감금되다

 

새재를 오를 때도 행인은 전혀 없었다. 새재 정상이 눈앞에 보이는데, 어둠이 깔리기 시작했다. 마침 화전민 가옥 세 채가 나타났다. 모두 빈집이었다. 잘 익은 옥수수가 방치되어 있었다.

 

이 고개를 넘으면 충북 괴산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그대로 행군해 고개를 넘고 싶었다. 그러나 가는 도중 민가가 없으면 노숙을 해야 하므로 도로변 가옥에서 하룻밤을 자기로 정했다.

 

옥수수를 따다가 가마솥에 삶았다. 고랭지라 옥수수 맛이 좋았다. 온돌방은 옥수수를 삶느라 지핀 불로 따뜻했다. 피곤했지만, 잠은 오지 않았다.

 

그때였다. 인기척이 났다. 숨을 죽이고 귀를 기울였다. 사람 소리가 들렸다. 문틈으로는 캄캄해서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 말씨로 보아 충청도 농민들인 듯했다. 그들은 지게를 받쳐 놓고 마루에 걸터앉으며 이야기를 나눴다.

“매일 밤잠도 못 자고 지게를 지고 이 고개를 넘어야 하니 딱한 신세야.”

“할 수 없이 하는 거지. 신세타령 하면 뭐가 달라지겠나.”

 

그들의 대화로 미루어 지게에 진 짐은 탄약 상자인 듯했다. 강제 동원된 마을 사람들은 도로 옆 풀숲에 널려 있는 탄약 상자를 지게에 지고 릴레이식으로 남으로 이동하는 게 분명했다. 한 패거리가 지나가면 또 한 패거리가 왔다. 또 어떤 이는 이렇게 말했다.

“새재 고개에 국군이 낙하산으로 자주 떨어진다고 해서 보안서가 긴장하고 있다네.”

 

8월 21일 먼동이 트면서 유격대는 새재를 넘어 충북 땅에 들어섰다. 계곡을 따라 내려가는데, 여기저기 격전 흔적이 보였다.

 

곳곳에서 작은 묘지가 발견되었다. 어떤 봉분에는 ‘육군 중사○○○’라는 팻말이 꽂혀 있었다. 김일성에 대한 분노가 새삼 치밀어 올랐다.

 

그때였다. “손들어!” 하고 누군가 고함치며 나타나 총부리를 들이댔다. 북한군은 아니었다. 평복 차림의 총을 가진 자들이었다.

 

그들은 손진 일행을 끌고 괴산군 연풍면 내무서로 끌고 갔다. 무조건 유치장에 밀어 넣었다. 유치장 안에는 이미 두 사람이 들어와 있었다. 한 사람은 대한독립촉성국민회 연풍면 지부장이었고, 또 한 사람은 연풍면 대한청년단 간부라고 했다.

 

그들 말에 따르면, 연풍면에는 해방 후부터 공산당 조직이 강했다고 한다. 특히 지금의 내무 서장이 악질로 소문난 자라고 했다. 그는 6.25 전에 서대문형무소에 수감 중이었는데, 북한군의 남침으로 풀려나 고향으로 와서 내무서장이 됐다고 했다.

 

그가 직접 세 사람(손진, 강창일, 이규범)을 취조했다. 그는 녹이 슨 권총을 닦으며 세 사람을 노려보았다. 침묵이 흘렀다. 시간이 꽤 흘렀지만 입을 열지 않았다.

그는 갑자기 강창일에게 물었다.

“어디서 무슨 목적으로 여기 왔는지 바른대로 말해 봐. 속일 생각은 하지 마. 동무가 우리 남로당에 있었다면, 언제 무슨 지령이 내렸는지 말해 봐.”

 

강창일은 주저 없이 척척 대답했다. 북상하면서 되풀이해 외운 내용이었다.

그러자 내무서장이 말했다.

“동무는 우리 당원이거나, 경찰 사찰계 형사이거나 둘 중 하나야.”

 

그가 사찰계와 결부시키는 것으로 보아 두뇌 회전이 빠른 악질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는 다시 말했다.

“세 놈 다 조사할 필요는 없어. 한 놈만 조사하면 돼.”

그는 제일 나이가 어린 이규범만 남게 했다. 손진과 강창일은 유치장으로 돌려보냈다.

 

이규범이 조사받고 고문당하는 소리가 유치장까지 들렸다. 손진과 강창일은 ‘규범아, 잘 참고 버텨라’라고 빌고 또 빌었다.

그때였다. “이 새끼 안 되겠어. 데리고 나가 처치해”라는 보안서장의 말이 들렸다. 그러고는 잠시 조용해졌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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