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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대한민국 건국의 숨은 주역-서북청년회(3)

- 다시 읽는 《서북청년회가 겪은 건국과 6.25》/손진 지음, 건국이념보급회 출판부

공장에서 좌익노조를 추방하다

 

 

일본이 패망하면서 남한에서는 좌익이 기선을 잡았다. 좌익 조직의 중심에 허성택을 위원장으로 한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전평)가 있었다.

 

허성택은 동경제대와 모스크바 공산대학을 나온 공산주의자였다. 그는 나중에 좌익 3당을 통합한 남로당의 당수가 되었고, 월북해 초대 노동상, 석탄공업상 등을 지냈다.

 

해방 당시 우리나라의 생산공장은 90퍼센트 이상이 일본인이 경영하던 적산 공장이었다. 미군 진주가 예상외로 지연되어 통치의 공백기가 생기자 전국의 공장과 산업체는 노동조합과 자치위원회가 운영 관리하게 되었다. 국영기업체인 철도공사, 전매공사, 체신청 등에 강력한 노동조합을 결성했다.

 

좌익 노동자들이 차지한 공장 중 한국 기업가가 세운 공장도 있었다. 영등포에 있던 경성방직이었다. 경성방직은 〈동아일보〉와 고려대학을 설립한 김성수의 동생 김연수가 세웠다. 1919년 10월 삼일운동 독립선언문이 낭독된 요릿집 태화관에서 창립총회를 열었다. 인촌 김성수, 철종의 사위인 박영효, 국어학자 이희승 등 당대 지식인들이 참석했다. 주식 공모 등을 거쳐 근대적 기업의 형태를 갖췄던 경성방직은 근대적 기업의 효시로 꼽힌다.

 

해방 후 좌익 노동자들에게 경영권을 박탈당한 경성방직 측에서 영등포 공장을 탈환해 달라고 서북청년회에 요청해왔다. 특히 양평동 공장은 전평 위원장인 허성택이 직접 장악하고 있어 탈환이 쉽지 않아 보였다.

1946년 8월 당시 서북청년회는 정식으로 출범하기 전이었다. 서북청년들이 경성방직을 탈환하기 위해 부대를 편성해 트럭 세 대를 나눠타고 양평동 공장으로 갔다. 선두에는 평안청년회의 김성주, 함북청년회의 반성환과 장창원이 있었다. 앞서 소개한 평양 출신 레슬링선수 황병관도 있었다.

 

전평 측은 서청의 내습을 미리 알고 방위 태세에 들어가 있었다. 그에 따라 공장 문을 사이에 두고 싸움이 벌어졌다. 전평 측은 용광로에 달군 철봉을 휘두르며 맞섰다. 서북청년들은 함성 지르며 공장 안으로 들어갔다. 난투극이 벌어졌다.

 

서북청년들이 승리함으로써 경성방직 공장은 질서를 되찾았다. 경성방직 측은 평안청년회 간부였던 송태윤을 공장장으로 임명했다. 공장은 정상적인 가동을 시작했다. 좌익 노조 간부들이 물러난 자리에는 서북청년들을 채용했다. 그러나 이 일에 앞장섰던 김성주, 반성환, 장창원, 장동춘 등 11명은 미군정의 수도경찰청에 구속되었다.

 

경성방직 양평동 공장이 정상화되자, 경인공업지대에 밀집해 있는 공장들도 도움을 요청했다. 당시 인천에는 항만부두와 함께 공장이 많았다. 공장 노동자를 기반으로 일제강점기부터 조봉암, 이승엽 같은 공산주의자들이 나올 수 있었다. 그 때문에 인천은 ‘제2 모스크바’로 불릴 만큼 좌익이 강하게 자리 잡을 수 있었다. 그러다 보니 동양방직, 조선제마, 조선화학, 동지포전기, 조선기계, 야전장유, 조선알미늄 등 많은 공장이 좌익 노동자들의 자치위원회에 장악되었다.

 

우익도 조직화에 나섰다. 그들은 내리교회 목사 김영섭, 〈조선일보〉 인천지국장 최진하, 항일여성독립운동가 김경내, 예술인 정해궁 같은 지방유지들이었다. 그들은 1945년 9월에 이승만을 지지하는 국민회 인천지부를 조직했다. 10월에는 곽상훈, 하상훈, 전두영 등이 한민당 인천지부를 결성했다.

 

1946년 7월 곽상훈 등 인천 유지들의 요청으로 서울의 평안청년회 송태윤을 비롯한 현석종, 박청산, 김관호, 김태식 등 단원들이 내려와 평안청년회 인천지부를 결성했다.

 

인천에는 평안도나 황해도에서 배를 타고 온 월남민들이 많았기 때문에 새로운 단원을 많이 충원할 수 있었다. 1946년 12월 인천에서도 평안청년회, 함북청년회, 함남청년회, 황해청년회 등을 통합하여 서북청년회 인천지부를 결성했다.

현석종, 이영진, 김문식을 지도자로 한 서북청년들은 공장에서 좌익 노동자들을 몰아내는 일을 시작했다. 특히 평북 출신 모임인 압록강동지회 석탄공사 분회는 좌익 명단을 작성하여 단계별로 숙청 작업에 들어갔다.

 

서북청년들은 인천 동양방직 공장에 대한노총 분회 간판을 거는 데 성공했다. 뒤이어 서북청년회는 조선화학비료공장, 조선기계, 조선제마, 조선차량, 조선알미늄공장, 야전장유 공장을 차례로 탈환했다.

 

야전장유 공장에서 벌인 탈환 과정은 격렬했다. 관리인이 좌익이었기 때문에 탈환 작전이 번번이 실패했다. 1947년 3월 이인호, 최경천 등 30여 명이 회사에 숨어들었다. 정오가 되어 휴식시간에 전평이 집회하는 현장을 습격해 추방했다.

 

서북청년회의 투쟁 목표는 생산업체의 기능을 정상화하고 전평에 대항할 대한노총을 조직해 서북청년회 단원들의 직장을 마련하는 데 있었다. 그 결과 대한노총 중앙본부의 임원 자리는 대부분 서북 출신들이 차지했는데, 특히 황해도 출신이 많았다.

 

이런 일은 경인공업지구에 국한된 것만은 아니었다. 서북청년회는 경전, 철도공사, 석탄공사, 대한중석 등 많은 기업체에서 좌익 노동자들을 몰아냈다. 그 과정에서 많은 서북청년들이 희생되었다.

 

 

서북청년회와 미군정 경찰

 

해방 이후 조선총독부는 정권을 넘겨주기 위해 당시 신망을 얻고 있던 민족진영의 송진우에게 접근했다. 그러나 송진우는 정권 인수를 거부했다. 정권은 결국 좌익이었던 여운형에게 넘어가고 말았다.

 

권한과 막대한 자금을 받은 여운형은 건국준비위원회를 구성하고 그 조직을 확대해 남한 전역을 장악했다. 박헌영과 합작하여 이른바 ‘조선인민공화국’을 선포했다. 그에 따라 전국의 건국준비위원회들은 인민위원회로 간판을 바꿔 달았다.

 

해방 당시 남한에서 소수세력에 지나지 않았던 좌익이 득세하게 된 것은 재빨리 움직여 기선을 잡았기 때문이었다. 만약에 우익진영에서 조선총독부의 요청에 따라 각급 ‘자치위원회’를 구성하여 치안을 유지하다가 진주한 미군에게 넘겨주었더라면 공산주의는 뿌리내리지 못했을 것이다.

 

미군정의 기본 정책의 첫째 목적은 치안 유지였다. 일제강점기 경험 있는 경찰과 관리를 중용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미 좌익이 남한 전체를 장악해 살인, 방화, 파괴를 자행하고 있었다.

 

이 사실이 38선을 넘어 서울로 월남한 청년들이 대공 투쟁의 선봉에 서게 된 이유다. 서북청년들의 좌익에 대한 투쟁은 침묵을 지키며 방관하는 대다수 국민을 반공 대열에 끌어들이는 역할을 했다.

 

당시 미군정 경찰의 힘만으로는 전국 곳곳에서 조직적으로 일어났던 크고 작은 폭동을 감당하기 어려웠다. 특히 공비 출몰 지역인 전라남북도와 경상북도 산간지대에서는 더욱 그랬다.

 

좌익은 야간에 경찰서를 습격하여 경찰을 살해하고 무기를 탈취해 갔다. 또 우익 청년단체의 간부 집을 습격하여 살해하고 입산하는 일이 연속해서 일어났다.

 

서북청년들은 그러한 취약 지역에 파견되었다. 그들은 경찰지서를 지키기 위해 돌담을 높이 쌓고 주야 교대로 경찰과 경비를 섰다. 서북청년들은 경찰의 절대적인 신임을 받았다. 그래서 그 지방 처녀와 결혼을 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서북청청년회는 미군정 경찰 수뇌부인 경무부장 조병옥, 수도청장 장택상을 비롯해 전국 말단에 이르는 군정 경찰과 자연스레 협조 관계를 이루었다. 서북청년회의 대공 투쟁 과정에서 미군정 형법을 위반해도 경찰은 가볍게 처리하거나 묵인해 주기도 했다.

 

좌익이 미군정 경찰과 그 수뇌부인 조병옥과 장택상을 미워한 것은 당연했다. 좌익은 좌익언론을 총동원하여 두 사람을 중상모략했다. 암살 당할 뻔한 적도 여러 번 있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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